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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미국

흑백사진 찍기

설률 2017. 1. 23. 22:14


방 정리를 하다 손에 잡힌 워싱턴 조지타운에서의 2016년 여름.


 난 그저 작은 명함사이즈의 흑백 사진을 찍고 싶었던 건데그게 그렇게 어려웠다사진관을 가야한다는 일념 하에 섭씨 40도를 웃도는 뉴욕과 워싱턴을 헤집고 다녔다하지만 그렇게 발품을 팔아 겨우 건진 건 이 컬러 여권사진굳은 얼굴이 땀으로 범벅돼 있다번드레한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옷이 삐뚤어진 모양은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내가 사진관을 찾다 지쳐 들어간 곳이 결국 Fedex Office 였던 것이다사진관은 아니지만 왠지 여기서는 찍어줄 것만 같았다그리고 왠지 여기가 아니면 미국에서의 '흑백사진 찍기'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막상 들어가 보니 사진을 찍을 마땅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혹시 몰라 직원에게 나의 증명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다행히 그는

 "Yes, of course!"

 라며 순식간에 사진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었다직원은 '3분 여권 사진'의 대가인 냥 행동이 재빨랐다덕분에 나는 땀을 닦지도옷매무새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사진기 앞에 섰다뭐가 그리 급한지그는 셔터를 서너 번 누르더니 베스트 샷도 본인이 골랐다혹시 내가 아주 급해보였나뭐라고 불만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원수 같은 잉글리시는 목구멍 안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설상가상으로 나는 그의 민첩성에 정신을 뺏겨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흑백사진이 되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한 것이다그제서 흑백을 요청했지만

 "No, no black and white"

 라는 답과 함께 사진이 나왔다.

 사진은 예상보다 두 배 가까이 비쌌다그즈음 달러를 빠듯하게 쪼개어 아껴 쓰고 있던 터라 정말 아쉬웠다돈은 돈대로 쓰고 본전도 못 찾은 사진이었기 때문이다내가 찾던 본전은 흑백사진이었고본전 이상으로 기대한건 사진사와의 교감이었다.


 2013인도에서 5개월 정도 체류하던 중 흑백 명함사진을 찍게 된 적이 있었다명함사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사진을 찍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그저 친구와 델리의 대학가를 거닐다가 '외국에서 사진 찍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그런 단순한 동기로 얼떨결에 근처 사진관으로 향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아주 낡은 사진관이었다문을 열자 하얀 셔츠와 하얀 바지의새하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겨주셨고나는 할아버지의 풍모와 실내의 매캐한 먼지내에 왠지 모를 설렘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꼈다.

 마치 백 년 전쯤아니 그보다도 훨씬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오래된 목조와 유리로 된 장식장그리고 그 안을 빼곡히 채운 흑백사진들이 이 곳의 역사를 가늠하지 못하게끔 했다유일한 현대적(컬러사진은 인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네쉬’ 신의 그림뿐이었다알고 봤더니 할아버지는 오직 흑백 사진만 고수하시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께서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전시된 사진들을 쭉 둘러보았다사진 속 인물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는데그들의 더욱 짙어 보이는 눈동자는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어느 시대의 사람들일까이 사진은 오래된 것일까아니면 바로 어제의 것일까어떤 연유로 저들은 이곳에 와서 흑백사진을 찍었을까이것 역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이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이 사진관에서어쩌면 델리에서혹은 인도에서 가졌던 시간과 추억은 언제까지나 빛바래지 않고영원한 흑백으로 이곳에 머물겠구나오래된 추억도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겠구나조금 뒤나는 할아버지의 사진기 앞에 앉았고 플래시가 하고 터진 순간조금 전 흑백사진 속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한 순간을 공유했고 교감했다나는 정말 환하고 편안한 웃음을 지었고할아버지는 그 순간델리에서의 순간인도에서의 순간을 붙잡아주셨다. ‘.

 

 인도에서 한국에 돌아온 뒤로 이 흑백사진은 늘 나의 책상 앞 벽에 걸려있다스마트폰과 캠코더로 인도에서 무수히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왔지만그 선명한 컬러들은 이 흑백보다도 생생하지 않은 느낌이다.

 과거를 회상할 때 색깔은 불필요한 정보로 변해 그 때의 감정을 불러오는데 걸림돌이 된다그 정보들은 너무 확실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에마치 꿈같고 비현실적인 과거(특히 외국에서의 나)를 추억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게다가 컬러사진은 나의 기억력에 의지해 옛날을 천천히 더듬으며 음미하는 재미까지 앗아가고때로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알려주기도 한다.

 반면에 흑백사진은 장애물 없이 오롯이 사진 속 나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색깔의 한계와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 꿈같은 과거의 한 순간으로 나를 데려가준다그리고 어쩌면 다신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젖어들게 해준다흰 한지에 먹물을 떨어뜨리면 사방으로 서서히 먹물이 스미는 것처럼 그 공간과 시간을 천천히 확장시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흑백사진은 컬러사진보다도 더 생생하게 살아 날뛴다그래서 백발 할아버지가 찍어주신 흑백사진을 한참 보다면 그 순간을 넘어서서, 5개월간의 인도, 그리고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곱씹어 회상할 수 있.

 

 백발 할아버지 덕분에 흑백사진의 이런 매력을 알게 된 뒤로, 이제 외국을 방문하게 되면 흑백사진을 찍어와야겠다 생각했다그 할아버지와 나눴던 교감을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또 어떤 나라의 사진사와 각별한 추억을 가지기를 바랐다그리고 나중에는 그 사진들을 모아 컬렉션을 만들고 싶다는 소소한 소망도 있었다.

 인도 이후이 계획을 처음으로 실천한 곳이 이탈리아였다아쉽게도 평범한 사진사를 만나 나는 그에게 직업적인 피사체에 불과했지만 본전은 건져올 수 있었고, 이 아이는 두 번째 컬렉션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그 사진을 보면 나는 어느새 쾌청한 하늘 아래에서 지중해 근처를 뛰어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가 바로 미국이었다. 그런데 컬렉션의 옥에 티 같은 이 미운 자식을 데려오고 만 것이다. 이 사진을 통해 나는 미국 전체에 대한 그리움보다는당시 무더웠던 워싱턴 조지타운성격 급한 사진사비싼 사진 값 등을 떠올리게 되었다. 온통 아쉬움만을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어버렸다

 뭐 그래도 미운 정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흑백 사진에 대한 나의 단상을 이런 글로나마 정리할 계기를 주었다는 것. 이것으로 나름대로 사진의 역할은 했다는 것이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위로하며 다음 컬렉션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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